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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듣고 보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 아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소리를 내 관심을 끌어보지만, 아이에게서는 어떤 응답도 없다. 어떻게든 소리를 듣게 해보려고 애써보지만, 아이가 평생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임은 변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에게 밥을 어떻게 먹는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짐승처럼 밥을 먹고 이곳 저곳에 부딪히며 불필요한 존재로 살아가야만 했을 미쉘. 


“이 아이에게 알파벳은 ABCD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BLACK로 시작한다.” 미쉘이 가지고 태어난 삶의 조건은 어둠뿐이기 때문이다. 


블랙(Black) | 전체 관람가

개봉 | 2009. 08

배급 | 이언피쳐스


 <블랙>은 절망과 어둠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길어 올리는 영화다. 또한 어둠 속에 있던 미쉘이 세상의 빛을 만날 수 있게 이끌어 준 사하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 교사의 역할과 신념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미쉘과 사하이 선생님의 만남은 운명처럼 그려진다. 아버지는 미쉘이 동생을 안고 있다가 던져서 위험에 빠뜨리거나 촛불을 넘어뜨려 집에 불이 나는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미쉘을 사랑하지만 시설에 보내 최소한 나머지 세 명의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아내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아내는 도저히 미쉘을 시설로 보낼 수 없다. 미쉘의 행동은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하이 선생님은 유년 시절에 미쉘과 비슷한 상황의 친누나가 엄마에 의해 장애인 시설에 보내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 기억으로 인해 그는 평생 특수교육을 통해 장애아를 가르치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러나 장애 아동들을 돌봐온 지난 30년 동안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제자가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술만이 유일한 낙이 되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사하이 선생님은 미쉘에게 세상의 사물들을 하나둘 알려주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하이 선생님은 미쉘에게 세상의 빛을 전하기 위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장면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쉘을 다그친다. 모든 감각기관이 차단된 미쉘에게 단어를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은 물리적으로 입가에 손을 대고 입 모양을 전달하는 방법뿐. 


사하이 선생님은 자신의 신념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쉘이 ‘단어’가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세상의 모든 감각에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처음 미쉘이 ‘물’이라는 단어를 인지하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미쉘과 사하이 선생님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미쉘은 대학에 입학해서 당당하고 자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사하이 선생님과 함께이기에 가능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을 꼽자면 사하이 선생님이다. 그는 열정으로 가득 찬 인물로 묘사된다. 다소 괴팍하고 폭력적인 성향도 있어 보이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미쉘과 같은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하이 선생님의 신념과 열정이 없었다면 미쉘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도, 미쉘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2021년 대한민국에서 사하이 선생님은 존재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공교육시스템이 공고하게 작동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하이 선생님과 같은 장애아동 전문 교육자를 전담으로 모셔와 개인 지도를 맡기는 데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블랙>에서 미쉘의 가족은 상당한 상류층으로 묘사된다.


사하이 선생님은 교사로서의 의무를 너머 자신의 여생 전부를 한 아이에게 쏟아 내었다. 자기 자신 보다 미쉘이 중심인 삶이었다. 평생을 바쳐 장애아동들의 존엄있는 삶을 위해 애쓰다 결국엔 자신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마는 사하이 선생님은 신화적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가 행한 헌신적인 가르침은 숭고하기에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하이 선생님이 혼자 짊어졌던 역할을 함께 나눠질 교육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아이로 태어난 한 인간이 자라나 차근차근 자신의 한계를 넘고 다음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올바르게 안내해 주는 선생님. 그리고 자립해야 하는 순간 한발자국 떨어져 지켜 봐 줄 수 있는 선생님. 많은 선생님들이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블랙>은 서사적으로는 다소 평면적인 측면이 있지만, 대학생이 된 미쉘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액자식 구조이다. 기억이라는 테마를 전달함에 있어 액자식 구조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하이 선생님이 미쉘을 가르치는 성장 과정이 내부 이야기라면 미쉘이 모든 기억을 잃고 나타난 사하이 선생님의 기억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바깥 이야기이다. 


미쉘은 선생님의 믿음과 가르침대로 그의 세계에서 지워져 버린 단어를 다시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이 노력이 닿아 선생님은 미쉘이 그랬던 것처럼 ‘물’이라는 단어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미쉘이 정말 부러워졌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지만 내가 받은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때는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불현듯 선생님이 반복했던 말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감사를 표하고 싶은 선생님들이 하나 둘 생각났다. 미쉘처럼 극적으로 그 가르침을 돌려드릴 수는 없지만 학창 시절에 만났던 선생님들을 그리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지금처럼 계속 될 것 같다. 



씨네리터러시

‘씨네리터러시’는 오래전부터 교육의 도구였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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