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낙서를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에 낙서를 했든, 길을 지나가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흙 위에 손가락 그림을 그리든 간에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예술가가 된다.

머릿속으로만 그려졌던 하나의 형상이 내 손 끝에서 새롭게 하나의 형체로 태어나는 순간은 너무나 신비하고 황홀한 경험이다. 


예술과 낙서의 경계 

그런데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뒷골목 벽이나 건물에 울긋불긋 아주 현란하게 그려진 낙서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낙서인지 그림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힘든 벽화들. 


<출처:http://blocs.xtec.cat/sagarrabarcelonaangles/>


그라피티 (graffiti). 바로 이런 벽화나 그림을 그라피티라고 한다.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그라피티(Graffiti)란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린 그림이다.  



그라피티(graffiti)의 어원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이다. 분무기(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뜻하는 말로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한다.

뉴욕 브롱스 슬럼가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슬럼 문화로써 MC(래퍼), DJ, 비보이와 함께 힙합의 4대 요소라 불린다.

현대 그라피티는 1960~1970년대 미국 갱들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미국 갱스터들은 특유의 낙서를 벽에 남기며 영역을 표시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그라피티에 대해 반항적인 예술이라는 일부 부정적인 시선들도 있다. 

 그라피티는 누군가에게는 민원 리스트 중에 하나인 낙서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순간의 예술성을 응집시킨 예술작품인 것이다.

벽이라는 캔버스는 일종의 구속과 제한을 벗어난 영역이다.

그라피티 예술가들은 이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또 다른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장한다. 

바로 작가와 도시가 벽을 통해 대화하는 이 행위를 통해 미술과 디자인의 벽을 허물고 정통 미술사를 뛰어넘는 하나의 예술이 된 것이다.


동서양의 미를 조화시키는 예술가. 심찬양

 그런데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 그라피티로, 특히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들을 그려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그라피티 아티스트 ‘심찬양’이다.

그라피티의 본토인 미국 땅에서 그가 일약 세계적인 그라피티 작가로 인정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심찬양 작가를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의 교류 공간이자 작품을 전시하는 복합문화공간인 ‘더 컨테이너 야드’에 그린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작품이다.


 <출처: Royyal Dog instagram>


먹색의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를 입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흑인 여성 옆으로 멋진 서체의 한글과 단아한 자태의 꽃이 조화를 이룬다. 
이 그림으로 “동서양 문화를 잇는 화해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언론의 찬사는 물론 ‘한복을 입은 흑인’을
그리는 그라피티 작가로서 그의 그림을 본 흑인 여성들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흘렸다” 라는 메시지도 받게 된다. 

그는 그라피티에서 외설적으로만 표현되던 흑인 여성을 한복을 통해 점잖게 예를 갖춰 표현한 것에 사람들이 감동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며 “무시 받아왔던 것에 대한 상처와 회복, 화해 같은 다양한 메시지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백인과 흑인간의 인종차별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상처받은 흑인들을 이해해주고 안아주는 듯한 이 그림은 그에게도 그라피티를 함에 있어 자신만의 개성을 찾는 계기가 된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즐거워하는 미국인들을 보며 한국인의 자긍심과 한복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출처: Royyal Dog instagram>

우연성과 평등 그리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는 그라피티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이 줄 수 없는 예술적인 의미를 대중에게 전달했다.
그라피티의 매력은 우연성과 평등 그리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전시장처럼 예상된 장소가 아닌 길을 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강렬한 그림에 압도되는 우연성과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도 소유할 수 없고 직접 거리로 나온 누구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평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이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에 더 많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Royyal Dog instagram>

부산 해운대 영무파라드 호텔 12층에서 15층 벽면에 붉은 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 그림이 그려졌다. 
이 그림의 제목은 <Walk in Your Shoe 2020>. “Put yourself in one’s shoes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라)”에서 따온 제목이다. 

Put yourself in one’s shoes.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라)

무작정 벽면에 아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술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낙서에서 시작한 그라피티가 지금은 예술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었지만  그라피티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무엇’으로 규정하느냐 하는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라피티는 그 공간에 하나의 ‘선물’을 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주변의 경관과 조화되고 그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요소를 활용해서 그려야 한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인생의 벽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지만 그 순간 더 많이 빛나는 그라피티처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순간에 가장 빛이 났던가?
다른 사람의 눈에 한낱 낙서에 불과하다고 보여지는 인생일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근사한 예술작품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당신의 본질을 잊지 말고 그 이상의 가치를 전해주는 삶을 살아보자. 
그리고 그라피티로 사람들에게 상처와 화해, 평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찬양씨를 통해 우리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자, 당신은 이 그라피티 작품에 어떤 제목을 붙여주고 싶은가. 당신의 시선에서, 당신의 입장에서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출처: Open Your Eyes,” by American graffiti artist JonOne (Seoul Arts Center)>

[글] 동심영유아교육생활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