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에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군사문화가 지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구호가 넘쳐났다. 지금도 기억나는 기억의 한 단편 중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거울을 보며 “넌 할 수 있어!” 이렇게 두세 번 소리를 외치며 결심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나도 당연히 해 보았는데 그 당시 내 자존감이 낮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결심을 하면 더 혼란이 밀려오곤 했다. 어색하기도 하고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 즉시 마음 속에서 "네가 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그런 반문이 떠올라 마음이 힘들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칭찬 들을 만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행복이나 만족보다 먼저 올라온다. 그래서 그 시절 나에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 뭘 할 수 있느냐는 힐난하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 그때의 기억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뭔가 하는 만큼 내가 가치 있다는 초자아에서 벗어나 있음을 본다. 거울을 보며 “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괜찮아!" 그렇게 여유 있는 Being(존재)의 충만을 경험한다.




예전에 한 여성과 상담을 진행했다. 너무 자존감(self esteem)도 낮고 수동적이며 일은 하지만 망상이 취미인 사람 같았다. 그 무기력감에서 혼자 벗어나기 힘들어 상담을 신청한 것이다. 1시간씩 3회차를 하고 거의 상담이 마무리되려는 시간에 내담자는 지금 자기가 무얼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3시간 상담을 하며 느낀 바를 이야기해 주고 운동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남은 시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앞으로의 진로 문제는 미리 어떻게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뭔가 어색하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 “제 이야기가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런 면이 있다면 말을 해 주세요.” 그러자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지금 하신 말씀이요. 하나도 틀린 말이 없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제가 상처 안 받도록 부드럽게 말을 해 주셨지만 사실 그런 말들 ‘무엇을 해야만 한다.’, ‘무엇을 못 하면 안 되니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 이거 사실 제가 평생 제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말이에요. 특히 아버지가 늘 부지런한 분이셔서 제가 좀 행동이 느린 편이거든요. 그걸 게으르다고 너무 비난하셔서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선생님이 그런 분이 아닌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제가 마치 비난하는 아버지 앞에 있는 느낌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럼 무슨 말을 듣고 싶으세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이 마음에 충격과 울림을 주었다. 

“지금도 괜찮아! 그 말이요. 하라고,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말고요. 지금도 너 괜찮아!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며칠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말의 울림이 가슴에 차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녀만 갈망한 말이 아니라 나 역시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괜찮아!”


나이가 조금 들어서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왜 그렇게 우리 어린 시절은 편안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본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사람을 달달 볶듯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나 그때나 우리 아이들이 공부 문제로 고생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정말 시험이 너무 많았다. 학교는 언제나 시험으로 시작해 시험으로 끝났다. 징글징글 사람을 피 말리는 시험. 또한 그 시절은 개성이 드러나면 모났다고 망치를 들이댔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가치, 일반 시민보다는 군대의 가치가 더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은 “네가 무엇을 잘 해서 괜찮아”가 아니라 “네가 존재해서 괜찮아!”, “네가 그저 너여서 괜찮아!”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에 한이 맺혀 있던 것이다.


아침마다 일어나 세수하기 전 얼굴을 본다. 얼굴에 잔주름은 왜 이리 늘었는지 인상을 쓰려 하다 “아차”한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보며 슬쩍 웃어준다. 어색한 웃음이지만 잠시 일부러 웃어준다. 자다가 일어나 머리는 눌려있고, 눈은 충혈이 되고 얼굴은 부어 있어도 나는 나에게 웃어준다.



“지금도 괜찮아!”



[글] 변상규교수
대상관계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특임교수


[저서]
네 안에서 나를 보다(2007), 마음의 상처 심리학(2008), 자아상의 치유(2010), 때로는 마음도 체한다(2014)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