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F. Harlow)가 심리학의 판도를 바꾼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을 통해 심리학의 큰 줄기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실험이었다. 당시는 유럽과 미국에서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아기들에게 구강기적 만족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학설이 많은 산모에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할로우는 인간도 포유류라는 전제를 갖고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이론을 뒤집는 실험에 착수했다. 


내용은 이렇다. 철사와 천으로 만든 모형 엄마를 각각 만들고 우유는 철사로 만든 모형에만 둔 뒤 어린 새끼 원숭이를 놓아주었다. 새끼 원숭이는 우유 꼭지가 있는 철사 엄마 조형물에 붙어 3~4초간 우유를 빨다 곧바로 천(벨벳 담요)을 두른 원숭이 모형에 다가갔다. 그리고 천 원숭이를 꼭 끌어안고 18시간 이상을 몸을 비비며 같이 지냈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도 포유류로서 프로이트가 말한 젖 주는 엄마 즉 구강을 만족시켜주는 엄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엄마의 역할은 아기를 만져주고 접촉하며 안아주는 엄마라는 사실을 보여준 놀라운 실험이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그 원숭이는 새끼를 낳았고 어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새끼 원숭이가 다가와도 늘 자기 꼬리를 빠는 이상한 모습만 보일 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험을 위해 선택된 이 불쌍한 원숭이는 어린 시절에도 실험을 이유로 어미 원숭이와 단 한 번도 접촉이 없었고, 번식을 위한 수컷 원숭이와의 접촉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 실험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모성애라는 것이 과연 선천(nature)일까? 아니면 후천(nurture)일까?

결론은 후천이었다. 그래서 애착 이론에서는 아주 특이하게도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대물림, 즉 모든 아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부모의 모든 정보를 뇌에 각인하는 유아기

사랑을 받은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주고, 방임당한 아이는 방임을 자연스럽게 준다. 학대받은 아이는 자라 아이를 학대하게 된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된다. 무슨 마법에 걸린 저주마냥 왜 이렇게 될까? 그것은 바로 유아기 시절 아기들은 부모가 행하는 모든 정보를 뇌에 각인(imprinting)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착 이론에 ‘결정적 시기’라는 독특한 주제가 나오는 것이다. 즉 아이마다 학습이나 언어나 특정한 정서를 발달시키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시기를 놓치면 그것을 되돌리는 것이 아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뇌가 그런 각인(애착과 정서 교감의 각인)을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면 그 아이는 자라서 상식적인 공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상식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힘들어한다. 어쩌면 그렇게도 상식적인 것을 모르냐 윽박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이미 그런 식으로 뇌 회로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그럼 그런 사람을 애착 패턴으로, 공감 패턴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바꿀 수 없다면 이런 글도 쓰지 말아야 하고 애착 이론은 운명론이 되는 것이다. 바꿀 수 있고 바뀔 수 있다. 다만 어린 시절 자체가 굳지 않은 시멘트와 같아서 한 번 굳으면 다시 새롭게 변화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 시멘트 위에 다시 부드러운 시멘트를 바르든지 아니면 이미 굳어진 시멘트를 모조리 깬 후 다시 부드러운 시멘트를 바르는 수밖에 없다.


아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 

인간에게는 동물보다 뛰어난 반성하는 능력과 공감의 능력이 있다. 이 두 능력이 발휘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진 욕망과 흥미의 지점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뭔가 욕망이나 관심이 올라오면 그 부분을 교집합 삼아 그 부분을 통해 공감대를 좁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하나둘 공감할 수 있도록 감정의 선을 밀도 있게 교류하면서 하나하나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 ‘빠진 고리(정서적)’를 하나둘 서서히 보여주고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끼 원숭이와 어미 원숭이가 서로 다정한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새끼 원숭이가 어미 원숭이에게 다가갔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고, 어미 원숭이가 자기 꼬리만 빨고 있다면 아기 원숭이는 어떤 마음일까‘ 라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방임의 경험이 있던 아이들은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 아마도 그 어린 시절 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망가진 지점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 지점에 머무르는 즉시 뇌가 망가져 본 적 있는 사람은 갑자기 회피나 두려움이나 짜증이나 멍 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 퇴행한 것이다. 퇴행이 맞는다면 그 지점이 그 아이의 가장 아픈 지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그 부분을 스스로 방치하지 않도록 상담을 통해 혹은 놀이 치료 등을 통해 필요한 격려, 공감, 조언, 직면으로 이끌면 마치 최면에 걸린 그 고정된 기억이나 상처의 아픔들이 풀리면서 갑작스러운 감정이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전제해야 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고요히 그 순간을 담아주고 심리적으로 안아주는 일이다. 그것도 어렵다면 곁에 가만히 머물러주는 일이다. 그게 아주 작은 변화 같지만 큰 변화를 유도하는 작은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성장하고 사랑하려는 생명의 욕구

어린 시절 방임의 고통을 당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낳고 방임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들이 악하거나 나쁘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그 엄마가 아기였을 시절 받은 게 없었던 것이다. 받은 게 없으니 무얼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육아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 우리 마음에는 더 자라지 못한 아이의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정서적 결핍으로 인해 건강하게 성장하고 싶은 욕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욕구는 생명의 욕구이며 살아있는 자에게 허락된 삶의 욕구이다. 그 욕구가 그 사람을 살게 하는데 그 욕구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본능이다. 진화를 믿던, 믿지 않던 인류는 긴 시간 포유류가 되기 위해 엄청난 변화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그 포유류가 다시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길고 긴 시간을 보냈다. 포유(哺乳)라는 말 자체가 젖을 준다는 의미다. 안고 젖을 준다. 안으면 아기의 눈이 보이고 입이 보인다.


엄마의 얼굴이 아기에게는 첫 세계인 것이다. 그 안아줌이 깊어질 때만 아기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유아기의 최면에 빠진 자기 꼬리를 핥고 있는 슬픈 어미가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를 끝까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슬픈 최면이 아니라 성장하고 사랑하려는 생명의 욕구이다. 그 본성이 우리를 변화와 치유로 이끌 것이다. 

 

 

행복을 만드는 교육

시대가 변화해도 여전히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행복을 만드는 교육’은 유아교육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 ‘중요한 발상’과 ‘실천’을 찾는 동심연구소의 노력입니다.

[글] 변상규교수
대상관계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특임교수


[저서]
네 안에서 나를 보다(2007), 마음의 상처 심리학(2008), 자아상의 치유(2010), 때로는 마음도 체한다(2014) 외 다수